[제4차 정기총회-김종수 주교님 훈시]

안녕하십니까. 오랜만에 뵙는 수녀님들도 계시네요. 어제 저녁에 이상규 신부님과 이야기 하는 중에 신부님께서 말씀하시기를 합의문을 다 읽어봤는데 이거 합의 하려고 7년이나 걸렸냐고 하셨습니다. 제삼자가 보면 하루저녁이면 될 것 같을 수 있겠지만 박문수 신부님께서 이야기 하신 것처럼 신뢰문제가 깔려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지요. 제가 표현을 잘 못하면 굉장히 잘못될 수도 있지만 대전교구로 본원을 옮기시고 그 동안에 총원장 수녀님 잠깐 뵈었고 부총원장 수녀님 매번 뵙고 참사 수녀님 몇 번 뵙고 관심을 갖고 하면서 제 안에 들었던 솔직한 생각은 이렇습니다. 하느님께서 여러분들에게 예수님의 말씀대로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으라’는 뜻에서 새 부대를 주셨다고 분명히 느꼈습니다. 그것은 수원교구가 헌 부대다 그런 뜻이 아닙니다. 수원교구가 대전교구보다 훌륭하지도, 대전교구가 수원교구보다 훌륭하지도 않습니다. 말씀드린 대로 신뢰가 부족한 상태에서 합의문이 나오기는 했지만 그 밑에 깔려있는 여러 가지 것들, 그런 것들은 금방 해소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으라고 주셨고 그래서 일단 해결하기 보다는 어떤 것은 덮어놓고 지나가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귀찮아서 덮어놓는 것이 아니라 세울 것을 세우면 저절로 정화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기에는 여러분이 대전교구에 오신 것이 어쩌면 가져야 될 것은 굳건히 하고 세울 것은 세우고 나머지는 저절로 정화가 되도록 하느님께서 그런 기회를 주셨다고 저는 그렇게 믿겠습니다. 그런 점에서 수녀님들과도 이런 마음으로 만나고 싶습니다. 특별히 교구장 주교님께서 두 번, 세 번이나 여러분들의 총회가 잘 되고 대전교구에서 잘 뿌리내리고 수도회가 발전되도록 기도하고 있다고 꼭 전해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먼저 가벼운 이야기로 시작하죠. 여기 본당수녀님들도 계실 텐데 한 가지 알려드릴게요. 전례지침서를 보면 교구장 주교라고 되어 있는데 거기에는 보좌 주교도 포함하는 겁니다. 교구장 주교가 미사 할 때 초를 놓는 방법을 기억해야 됩니다. 우선 주교자격으로 왔느냐 그냥 왔느냐입니다. 예를 들어 그럴 일은 전혀 없지만 지나가다 그냥 미사 드리고 싶어서 왔다면 그것은 주교 자격으로 온 것이 아닙니다. 그때는 평소대로 놓으면 됩니다. 그러나 주교자격으로, 오늘도 그렇게 온 것인데, 주교자격으로 왔을 때는 초를 7개 놓습니다. 전례적으로 어느 경우든 초를 3개씩 놓고 주교초를 놓는 것입니다. 즉 본당에서 주교님이 견진을 온다던지 공식적으로 오신다면 양쪽으로 초3개를 놓고 주교초를 놓으시면 됩니다.

무슨 말씀을 수녀님들께 드릴까 하다가 편안하게 나누면서 성모님에 대해 나누고 수녀님들이  이번 총회를 해 나가시길 그냥 보편적인 이야기를 드리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는 영성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죠? 저는 고등학교 졸업하고 대학교 4년, 군대 공군 장교로 4년, 대학원 2년 이렇게 딱 10년 뒤에 신학교를 들어갔습니다. 간단하게 얘기하면 하느님의 말씀을 읽다가 어떻게 속이 다 뒤집힌 것이죠. 그래서 사제가 되고 싶다는 마음이 들어 신학교를 가게 되었습니다. 저는 원래 하느님께서 사제의 길로 일찌감치 불러주셨는데 다른 길로 가다가 이제 사제직에 왔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하느님께서 이 길을 통해서 사제로 불러주셨다고 당연히 생각하고 신학교 생활하면서 표현하자면 정말로 신학적인 인간이 되고 싶었습니다. 공부 잘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교회의 사람이 되고 싶었다는 뜻입니다. 근데 이전에 저를 강렬하게 지배한 사상이 있었습니다. 막시즘. 막시즘의 사회주의 책을 늘 너무 침취해서 읽었습니다. 어쩌면 하느님께서 저를 불러주시는데 어떤 면에서는 참 쉬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저에게 굉장히 강렬한 것과 반대되는 것을 보여주셨기 때문에 대비가 너무나 확실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신학교 들어가서 처음부터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성서를 읽고 큰 감동을 받아 막시즘과 전혀 다른 하느님 말씀을 읽고 오기는 했지만 그러나 여전히 제 마음속에는 막시즘의 사상이 어딘가에는 뿌리 내리고 있을 것이 분명하고 그래서 막시즘을 공부했던 때와 같이 할 수만 있다면 그보다 더한 깊이에서 신학공부를 해서 내 안의 옛날 막시즘이 건드렸던 부분을 신학이 건드려야 그래야 내가 올바른 사제가 된다고 생각을 해서 저는 처음부터 그렇게 했습니다. 그래서 공부를 열심히 했습니다. 많이 알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 지성이나 내 안에 막시즘이 지나갔던 자리는 반드시 신학이 지나간다는 생각으로 공부를 열심히 했습니다. 처음에는 신학의 전체적인 이야기를 잘 정리해 놓은 것이 도그마이기에 신론, 그리스도론, 교회론, 마리아론 등 도그마에 대한 공부를 많이 했습니다. 마침 심상태 신부님이 계셨기 때문에 제가 그분 책도 읽고 소개해 주는 책도 읽고 해서 빨리빨리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정도는 정리가 되니까 역시 성서로 돌아갔습니다. 시작이 그랬으니까요. 그래서 성서 공부를 계속 하면서 나중에 신부가 되어 신학교를 나올 때는 성서를 읽으면서 기도가 제 안에 들어오고, 지나고 나니까 기도로 하느님께서 매만져 주셨음을 느꼈습니다. 그런데 신학교에서 공부하면서 수도영성에 대한 관심을 자연스럽게 가지게 됐습니다. 제 생각에는 신학이든 뭐든 그 모든 것이 다 필요하지만 영성이 우리를 살게 하는 것이라 여겨집니다. 그러면서 저는 이제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교회의 영혼 같은 것이 있다면 그것은 수도자의 영성이다. 신학교에 있으면서도 선배들과 도그마에 미치다시피 공부하고 성서공부를 또 정말 열심히 하고 하면서도 늘 영성이라는 단어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저는 늘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여기 이게 볼록렌즈라고 하면 햇빛을 받고서 한 참 있다 보면 종이가 탑니다. 한 점에 집중적으로 모아지는 그것이 있어야 말씀이 내 삶을 태우는 것이라고. 대충 열심히 살아서 그 근처에 얼쩡대봐야 작은 점들이 모이기는 하겠지만 대충 모여 봐야 종이를 못 태웁니다. 한 점에 모아져야 종이가 탑니다. 이렇듯 그것을 집중시켜 주는 영성. 그래서 같이 공부하는 프란치스코회 친구한테 프란치스코회 영성에 대한 책을 빌려 그것을 몇 번 읽어봤습니다. 그 다음에 가르멜. 그러면서 저한테 자연스럽게 이게 영성이구나 하는 개념이 생겼습니다. 물론 제가 만든 개념은 어느 책에도 나오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영성을 그렇게 정의 내렸습니다. 한마디로 얘기하면 ‘그리스도를 정점으로 하는 하느님의 구원 역사를 담아내기 위해 하나의 주제로 표현한 것’. 말하자면 프란치스코 성인은 프란치스코의 가난, 없이 사는 것인데 그것은 그리스도가 일궈 낸 것입니다. 프란치스코에게 ‘가난’이라고 하면 그리스도가 가난한 것입니다. 그냥 조금 검소하게 살아보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가 가난한 것인데 그 그리스도를 내기 위해서 하느님은 그 가난이라는 주제로 처음부터 당신 아들을 내 줄때까지 모든 것을 버리고 가난하게 사신 분이십니다. 그리스도를 정점으로 하는 구원의 역사를 프란치스코 성인은 가난으로 읽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 가난이라는 단어로 자기 자신을 비추어 본 것입니다. 내가 오늘 하루 동안 감정을 가난하게 사용했는지, 재물을 가난하게 사용했는지, 내 이웃을 만날 때 가난의 마음으로 만났는지. 즉 그리스도를 정점으로 하는 구세사가 하나의 주제로 표현이 되고, 그 주제가 내 삶을 비추어 주는 것, 그것을 영성이라고 정의를 내리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비교하기 쉽게 우리가 착각할 수 있는 영성생활, 바로 영성생활이 아닌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첫째 영성생활은 자아실현이 결코 아닙니다. 나를 완성하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많은 달란트를 주셨는데 그 달란트를 활짝 꽃피우는 것으로 착각할 수 있는데 그것은 영성이 아닙니다. 하느님이 주셨으니 활짝 꽃 피워야 할 것 아닙니까 할 수 있는데 그것은 영성에 대해 전혀 모르는 경우입니다. 제 경우로 봐서 나한테 하느님이 주신 가장 중요한 것이기 때문에 꽃 피워야 될지 아니면 가장 중요한 그것을 버리기 위해서 비우는, 나를 버리기 위해 주신 것인지 전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그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꽃 피우든지 버리던지 그것은 하느님께 물어봐야 될 일입니다. 하느님이 주셨으니까 이루어야한다는 자아실현을 위한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가장 위험한 것 중의 하나가 뭐냐면 성실한 직업인처럼 사는 것입니다. 이것은 극구 피해야 할 일입니다. 성실한 직업인은 굉장히 열심히 일합니다. 그리고 그것에 대한 보수를 원합니다. 삼성 같은 곳에 들어가면 무지무지하게 열심히 일하고 월급을 받아야 할 것 아닙니까. 그러니까 성실한 직업인처럼 살면 안 됩니다. 우리에게는 이렇게 불려서 사는 것 그 이상의 보수는 없습니다. 그 자체가 보수인것이지 그 이상의 다른 보수는 우리에게 없는 것입니다. 하느님으로부터 이 자리에 불렸으면 이 자리에서 사는 자체가 나에게 보수이고 그 이상은 필요하다면 아까 미사시간에도 언뜻 말씀드렸지만 그 이상 필요하면 내 자존심도, 벗도 다 내줘서 그 사람 사는데 도움이 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영성생활은 관계가 발전되는 것입니다. 하느님과의 관계가 계속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특히 성모님과의 관계가 계속 발전되어야 하는 것이고 옆 사람과의 관계가 계속 발전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성모성심 수녀회입니다. 여러분 회헌을 보니까 제가 좀 불만이 있더라구요. 성모성심 회헌을 보니까 회헌 앞에 성모님에 대한 얘기가 왜 이렇게 없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러분들 마음에는 있겠지만. 이것이 제 주교 반지인데 네모진 것 안에 원이 있고 원 안에 성모님이 성서 책을 들고 있는 모양입니다. 성모님께서 예수님을 잉태하셨고 세상에 내어 주셨습니다. 그러니까 육신적으로 예수님을 그대로 낳아준 것은 성모님만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런데 말씀이 사람이 되셨다고 했으니 그 예수님을 말씀으로 바꾸면 우리도 똑같이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묵상으로 성모님이 예수님 대신에 성서 말씀을 안고 있는 모양으로 주교 문장을 했습니다. 성모님에 대한 묵상을 당연히 모든 신자들이 하는 것처럼 저도 그렇게 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모범으로 얘기하면 예수님을 따라야 되지만, 예수님을 따르는 모범으로는 성모님이 첫째라는 것입니다. 성모님에 대한 묵상을 저도 많이 하고 강론 때도 말씀드리지만 성모님은 여러분들이 너무나 많이 묵상하신 것처럼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받아들이고 그대로 실천하는 거기에 온전히 당신을 봉헌한 분이라는 것은 확실한 것입니다. 당신 말씀대로 이루어지소서. 처음부터 가브리엘 천사가 찾아왔을 때 잉태할 거라 하니까 ‘하느님이 그렇게 원하셔요?’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무슨 얘기를. 결혼도 안하고 남자도 알지 못하는데...’ 당연한 반응이고 일반적인 반응입니다. 그러나 가브리엘 천사의 얘기를 듣고 나서는 ‘예, 말씀대로 이루어지소서.’ 그렇게 받아들인 성모님이십니다. 그리고 성모님에게는 받아들이는 방법이 또 있습니다.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 이 말이 루가 복음에 두 번이나 나옵니다. 하나는 루카 복음 2장 20절 예수님이 탄생할 때 목동들이 거기에 대해서 환호하고 마지막에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예수님을 성전에서 찾았을 때 ‘아버지와 내가 너를 찾느라고 얼마나 애태웠는지 아느냐’ 했더니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 그 이야기 뒤에 ‘아이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고 나옵니다. 성모님께서는 확실히 이해를 못하셨지만 그것을 그대로 간직하셨습니다. 그것을 무슨 소리야 하고 틀렸다고 버리지 않은 것입니다. 저는 이런 성모님의 태도를 늘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에게서 일어난 일,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그대로 내 안에 간직하면 언젠가 이 말을 알아들을 때 통째로 알아들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알아들은 것만큼만 깎아내면 나는 그 만큼만 남으면 주님 말씀을 알아들을 수 없는 것입니다. 통째로 그대로 그냥 놔뒀다가 하느님을 새롭게 만나기 위해서 알아들을 때 통째로 알아듣는 것. 가브리엘 천사 얘기를 듣고 인간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지만 하느님의 뜻이라고 했을 때에 즉시 ‘말씀대로 이루어지소서.’ 이해가 가지 않을 때 그대로 간직하는 것. 성모님의 그런 모습이 저는 그렇게 하면 되겠구나, 성모님이 사랑이신 분이셨구나 하면 되는 것입니다. 성모님은 예수님을 평생 따라 다니셨습니다. 탄생 때 예수님을 이 세상에 낳아 주시고, 공생활 이전에는 같이 사셨을 것이고, 공생활 중에는 예수님께 몇 번 가신 적이 있으시고, 나중에는 십자가 밑에 어머니로 거기에 계셨고, 교회 창립 때 계셨고. 평생을 예수님을 따라다닌 분이십니다. 그리고 예수님 말씀대로 예수님 돌아가시기 전까지는 아들을 따라 다니다가 예수님 돌아가신 다음에는 예수님 말씀대로 제자들 따라가고 결국은 교회를 따라가신 분이 성모님이십니다. 그래서 생명의 움직임, 그 활동을 완전하게 체험하신 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미 잉태하실 때 성령이 함께 하시고, 또 성령이 함께 하실 것이다 하셨습니다. 그리고 말할 것도 없이 나중에 교회 창립인 성령강림 대축일, 오순절에 제자들과 함께 성령이 어떻게 움직이시는지 바로 눈앞에서 보신 분이십니다. 그렇게 성모님은 바로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시는데 있어 어려움 없이 아주 유순하게 하셨고 예수님을 평생 따라 다니셨고 성령 체험, 성령의 이끄심에 아주 유순하게 따랐던 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성모님의 모습이 수녀님들 한 분 한 분에게 깊이 내적으로 영적으로 깊이 각인이 되어야 하고, 성모님이 하신 일은 말할 것도 없이 이번 총회도 그렇게 이루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를 위해서 수도회를 위해서 말입니다. 그렇게 하실 수 있도록 수녀님들 마음의 걸림돌이 수원에서 대전으로 옮겨짐에 따라 그런 것들을 행하지 않고 가실 수 있는 조건이 된 것 같아서 그래서 제가 ‘새 술은 새 부대’라고 한 것입니다. 그래서 새 총원장 수녀님이 뽑히면 총원장 수녀님이 저나 유 주교님께 인사를 올 때에도 긴장감 그런 것 없이 기쁜 마음으로 오시면 되는 것입니다. 합의문이 되면 대전으로 옮기겠다는 이런 결심하신 것 아니잖아요. 그게 어떻게 동시에 이뤄진 것이지요. 제가 느낀 것은 그것이 동시에 이뤄진 것이지 수녀님들이 합의서만 되면 대전으로 오겠다고 합의하고 온 것도 아니고 그렇게 인위적으로 했다면 받아들이기도 어려웠겠죠. 오히려 인위적으로 했다면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텐데 전혀 인위적으로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런 일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수녀님들이 옮기신다고 유 주교님이 말씀하실 때 별로 의식하지 않고 다만 그 문제가 잘 해결되지 않으면 이곳에 와서 우리도 어려움이 있을 수 있겠지만 수녀님들도 또 어려움이 있을 수 있기 때문에 하여간 재산문제 등 잘 해결되고 정리되면 언제든지 받아줄테니 언제든지 오시라고 그렇게 얘기하셨고 여기 아까 신부님 말씀 들으니까 정리할 것 조금 남은 것 같긴 한데 큰 방향은 된 것 같습니다. 수녀님들께서 수도회 30주년을 맞으셨는데, 예수님 사생활 마친 시간으로 지금부터는 도약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도약을 하기 위해선 비전을 갖고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어떤 결정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 동안 기도 많이 하셨겠지만 하느님 앞에 기도하고 오직 그 안에서만 어떤 결정을 하시면 됩니다. 또 그렇게 되리가 믿고 저도 마음의 준비를 그렇게 하고 왔으니까 수녀님들이 그렇게 하시면 됩니다. 가끔 성서강의를 할 때 이런 말씀을 드리는데 우리가 평생 하는 일이 하느님 마음에 꼭 드는 일을 한 번도 못할 수 있습니다. 그렇죠? 그런데 그런 것은 별로 원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느님 마음에 꼭 드는 일을 못한다고 걱정할 필요 없고, 다만 해도 많이 안 빗나가는 일을 평생하고 살면 됩니다. 많이 빗나가지 않는 일을 하면 금방 돌아올 수 있으니까. 그림을 그리자면 이것이 하느님 뜻이라면 이 근처에서 왔다 갔다 하시면 됩니다. 전체 방향이 이 길을 따라가면 되는 것이지 주님 뜻에 맞추려고 해 봐야 맞춰지지도 않습니다. 하느님 생각과 우리 생각은 워낙 다릅니다. 우리는 늘 성서를 읽고 묵상하고 남을 사랑하려고 애를 쓰면 빗나가도 조금 빗나가고, 빗나갔다가도 금방 돌아올 수 있고 그러면 큰 줄기에서는 주님이 이끌어 가시는 방향으로 우리가 이끌려 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수녀님들의 회헌이 양적으로 얘기하면 별 차이는 없겠지만 조금 더 카리스마가 잘 표현되었으면 좋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말씀과 회헌, 수녀님들이 자주 읽고 때론 필사하고. 저도 필사 해 보면 저도 눈으로 볼 때와 소리 내어 읽을 때와 쓸 때가 정말 다르다는 것을 잘 느낍니다. 저도 성서를 여러 번 읽고 했는데 손으로 쓰면 읽을 때는 잘 못 느끼는데 손으로 쓰면 성서에 이런 말씀이 있었나 하고 합니다. 손으로 쓰면 이런 일이 자꾸 생기는 것은 쭉 읽어나가면 내용이 그냥 들어오니까 세부적인 것이 그냥 막 지나갑니다. 그런데 손으로 쓰면 ‘ㄱ’, ‘ㅏ’ 만지면서 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읽을 때는 다 읽으면서 내용을 묵상하면서 건너뛰게 됩니다. 그러다 쓰면 어느 말씀도 건너뛰지 않으니까 그런 일들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 부분에 이런 말씀이 있었구나 하고. 뭐 이런 말씀이 있었구나 하고 느꼈다고 해서 크게 득 될 것은 없겠지만 그런 일이 저한테 있었던 것이 좋은 일인 것이지요. 하여간 수녀님들 마음에 정말로, 어떻게 보면 새롭게 출발하는 그런 때에 수녀님들 마음속에 말씀 그리고 회헌을 자꾸 읽으셔야 거기로부터 감동이 생기는 것입니다. 개인적인 생각 어떤 옳다 그르다 그 생각은 어차피 하고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순간순간 어떤 소임을 하면서 말씀과 회헌이 나에게 어떤 감동을 주도록 그 일을 수녀님들이 계속 하셔야 여기에 불린 사람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회헌에 관해서 분명히 이렇게 말씀 드릴 수 있습니다. 수녀님들에게 회헌의 가치는 어느 정도냐. 객관적으로 얘기를 해서 성서말씀과 회헌의 가치를 비교하면 이건 비교할 수 없이 말씀의 가치가 훨씬 중요합니다. 그렇지만 수도자로 불린 여러분들에게 현실적으로 여러분들이 마음을 쓰고 시간을 거기에 쓰고 거기에 뭐가 들어있나, 이런 말씀이 있구나 하고 수녀님들이 현실적으로 거기에 시간과 마음을 쓰는 무게는 말씀과 회헌이 똑같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입니다. 이것만 말씀이 아니라 수도자가 돼 가고 여러분들이 말씀을 듣고 여기에 온 것입니다. 그리고 회헌은 이렇게 살라는 길입니다. 그러니까 말씀에 도달하는데 있어 하느님께서 나에게 이 회헌, 이 길을 주셨다 이렇게 생각을 해야 비로소 불림을 올바로 이해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에게 현실적으로 신학적으로 객관적으로 얘기하면 회헌과 말씀은 비교할 수 없이 말씀이 훨씬 중요한 것이지만,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있어서는 이 두 가지가 동등한 가치로 여겨져야 합니다. 성서 읽는 만큼 회헌도 읽어야 합니다. 물론 성서 안 읽으면 회헌도 안 읽어도 되는 그런 것이 아니고 성서 말씀을 열심히 읽으시고 그리고 회헌도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제가 시도하는 성서를 대하는 방법 중의 하나입니다. 이건 가장 좋은 방법인지 아닌지 알지도 못하고 제 경험상 말씀드리면, 매년 계획을 세우시기 바랍니다. 올해는 마태오 복음과 친해지자. 중요한 것은 무엇이냐 하면 성서 말씀은 모든 것이 하느님의 말씀이라 다 중요하지만 마태오 복음 하면 처음과 끝이 있는 예수님의 하나의 얼굴입니다. 그래서 마태오 복음과 친해져 보자 이런 생각은 제 경험상 상당히 유익합니다. 올해는 마태오 복음과 친해보자 그러면 다른 성서 읽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매일 독서, 복음 열심히 읽고 다 하면서 나머지는 마태오 복음을 쭉 읽으면 됩니다. 어느 부분은 좀 외우기도 하고. 읽고 또 읽고, 읽고 쓰고 하자면 여러 번 하게 됩니다. 그러면 나중에 마태오 복음이 내 안에 어느 정도 자리 잡는 느낌이 생깁니다. 다른 것 다 하면서 그렇게 해서 책 하나가 나에게 성서 말씀이 친숙해 지는 것은 굉장히 좋은 일입니다. 성서 전체를 그렇게 하자면 언제 다 하지? 그런 생각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한 번이라도 나랑 친숙해지면 되는 것입니다. 어떤 말씀이 잘 들어오면 그것이 말씀 전체를 보는 창이 됩니다. 마태오 복음, 마르코 복음, 루카 복음, 요한 복음, 이렇게 복음서 하나하나는 그냥 여러 책 중의 하나가 아니라 구약 전체를 담아내는 그릇이기는 합니다. 이러이러한 것을 거쳐서 하느님이 당신 안에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바오로 사도는 이것에 대해 설명하고 있고, 요한 사도도 저것을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서도 그렇게 하시고 회헌도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신학교에 있을 때 매년 수녀원 연 피정을 도와주러 다녔습니다. 연 피정을 도와 달라고 하면 한 1여 년 전에 그 회의 역사와 회헌을 달라고 했습니다. 그 회의 역사와 회헌을 자세히 읽어본 다음에 1년 동안 창세기부터 묵시록까지 다 읽어 가면서 나누고 싶은 장, 절을 표시했습니다. 그러면 한 두어 달 걸립니다. 물론 제 생활 다 하면서 하는 것이지요. 어차피 그게 아니면 다른 방식으로 읽을 텐데, 수녀원 연 피정을 도와줘야 하니까 그 방식으로 읽는 것뿐입니다. 그래서 장, 절을 쭉 찾아서 쓴 다음에 그 다음에 연 피정 때까지 한번이 됐던 열 번이 됐던 적어놓은 장, 절을 계속 반복해서 읽고 사는 거죠. 그래 강의록이라 하면, 연 피정 강의하면 8박 9일. 그럼 앞, 뒤 뺀 것이 7일. 그러면 14번 강의를 해요. 하루에 두 번씩. 앞에도 강의를 하면 15번 정도. 사실은 강의록이라고 써 간 것이 한 장도 없습니다. 근데 빈손으로 가면 수녀님들한테 스캔들 될 것 아니에요. 준비도 안하고 갔다 할까봐 1년 정도 준비했는데. 여기다 이만큼 올려놓고 해요. 올려놓고는 하지만 제일 위에는 장, 절만 쓰여 있습니다. 그래서 읽고 나누고 늘 그렇게 했죠. 근데 왜 5박 6일 밖에 안하는 거에요? 5박 6일은 좀 짧은 것 같은데. 회헌은 5박 6일이라 하면 6박 7일 하면 큰일 나는 것이 아니라 그만큼은 하라는 것이지요. 더 했다고 회헌 어긴 것은 아니니까. 어쨌거나 제가 강의를 하면 첫날은, 오신 첫날은 밤 11시에 자도 좋고, 12시에 자도 좋고 그냥 떠들라고 그럽니다. 오랜만에 만나 실컷 얘기하라고 하고, 다음날 늦게 일어날 수 있잖아요. 다음날 11시에 미사 할 테니까 아침에 쉴 사람 쉬시라고. 다만 주방하시는 분들 생각해야 하니까 아침 안 먹을 사람 표시하고 내일 11시 미사에 오라고 그때부터 피정 시작한다고. 쉬는 것도 피정입니다. 근데 우리 수녀님들은 피정을 전투적으로 하시더라구요. 피정은 하느님 안에서 푹 쉬다가 가는 것입니다. 몸만 쉬라하면 안되고 정말로 하느님 안에서 내가 푹 잠들다가 갔다 와야 그것이 정말로 피정을 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목적이기 때문이에요. 우리 삶의 목표는 그것입니다. 하느님 안에 푹 잠겨 쉬는 것. 혼자 책 읽고, 묵상하고 피곤하게 하지 말고 묵상은 내가 해 줄 테니까 주님 안에서 쉬면서 낮잠도 자고 그냥 푹 쉬었다 가라고 합니다. 대신에 오전 강의는 나오도록 합니다. 오전 강의는 들어야 하루 종일 묵상하고, 이것으로 충분히 더 하고 싶으면 오후 강의 제발 나오지 말라고 하지만 나는 이렇게 얘기해도 강의 빠지는 사람 못 봤습니다. 그래서 우리 수녀님들은 피정도 참 전투적으로 한다고 느꼈습니다. 는 미사 강론을 하면 전날 저녁에 보통 묵상하고 써 놓습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바로 그것부터 봅니다. 그리고 미사시간에 읽고 강론을 하게 되면 네 차례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저녁에 아침 일어나서, 미사 시간에 복음 읽고 복음에 대해서 말을 하고. 그럼 오늘 하루 살라고 한 것입니다. 제가 보좌 신부 때에는 딱 이만한 종이에 묵상한 것 잊어버리지 않도록 적어 가서 그것으로 미사 강론을 하고 미사 끝나면 조금 전까지는 이 강론을 한 사제이고 미사 끝나면 이 강론을 듣는 신자로서 그래서 이걸 사제관 왔다 갔다 하는 곳에 다른 사람이 보면 이상하니까 제가 왔다 갔다 할 때 하루 종일 눈에 띄는 곳에 압침으로 꽂아 놨습니다. 저도 이 강론으로 신자로서 하루를 살아야 되니까요. 그리고 저녁에는 찢어버립니다. 오늘 하루 살라고 준 것이고 내일은 또 말씀이 있으니까요. 그런데 어느 날 수녀님께서 이게 뭐냐고 하시면서 말씀드리니 저녁 먹기 전에 와서 그걸 다 뜯어가는 겁니다. 모아 놓는다고. 저는 그럴 필요 없다고 생각합니다. 평생 가져가라고 한 것은 평생 간직하면 되고, 하루 살라고 한 것은 잊어버려야지요. 다음날 강론은 그것만 들으면 되지 지나간 것을 자꾸 붙들고 그래요. 지금 우리가 사는 것이 일주일 전에 밥 먹은 것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어제 먹은 것으로 사는 것입니다. 30년 전 미사 한 것까지 왜 끌고 다닙니까. 왜 30년 전에 한 묵주기도를 주렁주렁 끌고 다닙니까.

중요한 것은 대전에 오셔서, 어쨌든 새롭게 출발한다는 표현이 맞는 것인지 아닌지 잘 모르겠지만 그것이 우리에게 새로운 힘을 주는 것이라면 그 표현 사용을 하느님께서 허락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새롭게 출발하는 것이라면 정말 우리가 가야할 방향, 우리 꿈을 담아내고 앞으로 간다는 생각으로 정말 여러분들이 하느님께서 교회를 위해서 수도회를 위해서 수녀님들이 생각하시는 앞길을 위해서 잘 선택하시면 되고, 그리고 수녀님들끼리의 관계를 정말로 잘 하셔야 그것이 하느님이 굉장히 원하시는 것입니다. 미사시간에도 제가 말씀을 드렸지만 딴 집에 있는 사람들 모아 한 집에 만들어 줬는데 왜 싸웁니까. 따로따로 있으면 안 싸우는데 힘을 얻으라고 한 집에 모아놓은 것입니다. 제가 종신 허원 때 말씀 드렸고 그 말을 계속 반복해서 드릴 것 같은데 수도회는 그렇습니다. 이 세상에 가장 가까운 관계는 가족입니다. 물론 가족으로부터 상처받고 그런 경우도 있지만 어쨌든 가족만큼 가까울 수는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자연인으로 살아가면서 하느님이 주신 가장 가까운 관계는 가족인데 굳이 거기에서 떼어 새로운 가족을 만들어 준 것입니다. 그러니까 수녀님들의 관계, 내가 저 사람을 생각하고 사랑하는 관계의 최저치가 바로 무엇인가하면 아주 좋은 가정이 최저치입니다. 하느님이 원하시는 것은 사랑밖에 없는데 그 사랑의 공동체에서 끄집어내어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어주면 여기의 최하치는 우리가 볼 때 온전한 가정인 것입니다. 온전한 가정의 가족관계가 여러분들의 최하입니다. 그것보다는 서로를 생각하는 것이 더 많아야 되고 깊어야 그래야 수도회가 새로운 종말론적인 가족 공동체가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부르신 이유도 충족되기 시작되는 것입니다. 저 가정도 있지만 이 가정에서 상대방을 이렇게 보도록 그것을 보고 수녀님들께서 그것으로 만나는 것을 신자들에게 그런 관계를 번지게 하는 것. 그래서 우리는 신부가 제일 높고 그 다음 수녀고 그 다음이 신자 아닙니다. 우리 천주교회는 전 세계에서 한국 천주교회는 신부가 제일 높고 그 다음에는 수녀님이고 그 다음에 세 번째가 평신도이고 그렇게 되면 우린 복음대로 살 수가 없습니다. 하느님이 주신 복음을 전하듯이 새로운 가족 공동체에 불러주신 이 관계를 복음을 전하듯이 사람들에게 그것을 전하는 것. 수녀님들이 그렇게 잘 준비된 마음으로 총회 잘 하시고 그리고 이제 앞으로 4년 뒤에 총회를 하실 때는 제가 이렇게 안 합니다. 도와드리는데 1년 이상 총회를 준비하도록 제가 도와 드릴 겁니다. 왜냐하면 총회는 수녀님들이 수도회를 다시 한 번 새로운 방향으로 정화시키고 발전해 나가는 아주 중요한 시간입니다. 그래서 어떤 때는 매년 4년 마다 1년 이상 준비하다가 한 10주년 쯤 되면 그때는 2년 정도 준비하는 식으로. 당연히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새로운 장상이 나오면 그야말로 ‘새 술은 새 부대’라는 말처럼 새로운 방향이 제시될 수밖에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때에 내 스스로 힘을 실어주고 나도 그렇게 하려면 수도회의 일상적인 리듬 중에 가장 중요한 굴곡의 시간은 총회가 분명합니다. 우린 매일 매일 새롭게 바오로 사도 말씀대로 매일 새롭게 살려고 노력은 하지만 새롭게 살아가도록 주어진 가장 확실한 표징은 총회라고 할 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 준비를 수녀님들이 잘 하시는 것이란 일반 생활을 안 한다는 것이 아니라 일반 생활을 하면서 지향점을 공동체적으로 가지면  그 공동체적인 지향점 때문에 수도회가 새롭게 태어나는 것이니까 그때는 그렇게 할 수 있도록 저도 수녀님들께 도움을 드리도록 할 것입니다. 총회를 준비한 처음부터 끝까지 성령께서 이끌어주시고 성모님께서 도와주시는 그 전구로 총회를 마쳐주시고 그것이 새로운 시작이 되는 것이겠습니다. 그렇게 시작 되어 잘 나갔으면 좋겠고 앞으로 제가 수녀님들 자주 만나서 뭐 수도회 운영에 관해서 관여할 건 전혀 없고 저로서 도와줄 수 있는 부분이 많이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저도 그런 노력을 하겠고 수녀님들도 이상규 신부님이 늘 사제들을 위한 기도를 하고 해서 깜짝 놀랐다고 수녀님들께 기도를 따로 부탁하지 않아도 되겠지만 사제를 위해서 유 주교님이나 저를 위해서도 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