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주님 봉헌 축일

   오소서, 성령님! 새로 나게 하소서!
   오늘은 주님 봉헌 축일입니다. 또한 오늘은 자신을 주님께 봉헌한 수도자들을 위한 날로 ‘봉헌 생활의 날 ’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전례적으로 뜻 깊은 날인 오늘은 미리내 성모성심 수녀회로 볼 때에 더욱 큰 의미를 지닌 축일이 됩니다. 왜냐면 바로 오늘이 수도회 설립 30년이 되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축하드립니다.
   또한 오늘 축일을 계기로 4년 마다 치러지는 새로운 총장 선거라는 막중한 과업을 수행하시기 위해 47명의 대의원 수녀님들이 한자리에 모였습니다. 특별한 은총이 필요하리라 생각됩니다. 저 또한 우리 대전교구에 입적하시어 첫 번째로 치러지는 선거라는 점에서, 대전교구의 한명의 사제로서 이 미사를 통해 여러분들과 미리내 성모성심 수녀원을 응원하겠습니다.
   친애하는 수녀님들.
이렇게 뜻 깊은 미사를 봉헌하면서, 우리는 우리 수도생활의 정체와 근원 그리고 사명을 다시 한 번 기억했으면 합니다. 물론 각 수도회는 자신들의 고유한 Charisma와 회헌을 가지고 있지만, 보다 근본적으로 교회의 전통과 복음의 원천으로부터 우리의 정체를 묵상해 볼 필요가 있을 듯싶습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수도생활을 “축성생활”과 “봉헌생활”이라는 단어로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면 축성과 봉헌은 무슨 뜻을 가질까요? 이에 대해 히포의 주교인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핵심을 찔러 가르쳐줍니다. “하느님의 이름으로 축성되고 하느님께 봉헌된 사람은 하느님만을 위해서만 살아야 하기에, 이 세상에서 죽음으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때문에 그것은 sacrificium 희생이라 불립니다.” (Ipsus homo, Dei monine consacratus et Deo devotus, in quantum mundo moritur ut Deo vivat, sacrificium est. 신국론 10)
   그렇습니다. 성인의 말씀을 한마디로 하자면, 수도생활은 하느님께 바치는 번제제물이 되어 죽어 없어지는 희생을 의미한다 하겠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하고많은 사람 중에 굳이 여러분을 성별하시어 축성하셨고, 또 여러분 편에서는 제물로 자신을 온전히 봉헌하는 생활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 교회는 이러한 여러분들의 제물로써의 희생과 봉헌을 필요로 합니다. 이는 비단 철없는 저 같은 교구 세속 사제의 생각을 넘어 우리 모두의 주인이신 예수님의 요구이기도 합니다.
   교회가 순례하는 이 지상은 어느 세기를 막론하고 하느님 백성을 위협하는 각양각색의 도전들이 산재해 있습니다. 교회를 거슬러 선동하는 여러 사상과 주의가 직간접으로 우리를 위협합니다. 특별히 우리 시대는 그 질과 강도에 있어 다른 시대보다 더 위협적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영적인 탁류 속에 교회를 지키고 보호하는 실제적인 역군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수도자들입니다. 교회의 긴 역사는 이러한 여러분들의 정체를 입증하고 있습니다. 수많은 역경과 고비 속에서도 빛나는 수도회의 출현으로 교회는 오늘까지 지속됐고, 주님이 다시 오시는 날까지 계속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여러분들은 영적전쟁의 최전방 진지를 사수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렇습니다. 수도자는 인류를 위협하는 돌풍이 휘몰아 칠 때마다, 마치 먼 옛날 이스라엘 백성이 정조 없는 아내 같이 될 때마다, 금송아지를 만들어 광란의 춤을 출 때에도, 철모르는 그들을 위해 산위에서 두 팔을 벌려 하느님께 탄원했던 모세와 같습니다. 성교회를 위협하는 강한 적들이 나타날 때는, 골리앗 장수를 돌팔매로 무찌른 나이 어린 다윗과 같이 하느님의 힘만을 믿고 전투하는 거룩한 군사들입니다.
   교회를 위협하는 적들의 다양한 무기 앞에 두 팔을 벌린 기도나 돌팔매는 너무나도 보잘 것 없고 무기력하게만 보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말씀은 쌍날칼보다 날카롭다(시편149)고 했습니다. 그 “말씀‘의 위력은 여러분의 삶 속에 진동되어 울려 퍼질 때 효력을 보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바로 여러분들의 증거를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이 증거의 삶으로써 우리는 청빈과 정결과 순명이라는 3가지 무기를 택했습니다.
   가난은 인간 욕망의 근간인 소유를 포기함으로써 하느님만을 삶의 우선으로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의 청빈서약은 사오 바오로을 말씀대로 “풍요로움을 위한 그리스도의 가난”(2코린8,9)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청빈의 깊이는 그분의 모든 것을 아버지께 완전히 봉헌하는데서 드러났습니다. 가난은 때문에 완전한 자기 봉헌의 표현이요, 하느님만이 인간의 참 부요임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물질과 효율과 경쟁이 치닫는 이 세상과 교회에 여러분의 복음적 가난은 예언자적 저항이 될 것입니다.
   친애하는 수녀님들.
몰라도 한참 모르는 젊은 교구사제가 수도회의 가난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는지 들어보십시오. 사람들은 말합니다. “수도자는 가난한데, 수도회는 부자다!” 그렇습니다. 일반적으로 개인으로서 수도자들은 대부분 청빈서원을 준수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절제와 검소가 역설적으로 수도회의 부를 창출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를 어떤 이는 “수도승적 청빈의 악순환”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과연 청빈은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나게 하는 “반대 받는 표징”의 역할을 합니다. 오직 주님께만 마음을 두고 여타의 물질적 안정내지는 보장에 저항하여 하느님께만 맡기는 수도회로서 세상의 성사가 되길 기도합니다.
   친애하는 수녀님들.
   복음은 주님을 따르고자 마음먹은 이들에게 “정결”할 것을 권고합니다. 과연 우리시대는 하느님의 커다란 선물인 성이 인간의 나약함으로 많은 상처를 입고 있습니다. 이러한 고삐 풀린 쾌락주의 우상에 여러분들의 정결서원은 원죄로 물든 인간의 나약함 안에 이루시는 하느님의 놀라운 일을 보여줄 것입니다. 또한 여타의 이기적 사랑에 무상의 참사랑을 보여주는 표징이 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의 독신은 가족과 가정이라는 제도가 주는 감정적 안정과 관계적 보호를 뛰어넘어 무상의 사랑을 나눌 수 있는 자유의 표현입니다. 그것은 배타적이거나 소유적인 사랑이 아닌 모든 이에게 개방된 희생적 사랑일 것입니다.
   여기서도 제가 감히 여러분께 부탁드리고 싶은 것은, 여러분들의 정결서원이 사랑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어떤 이는 수도생활의 독신을 이렇게 이야기 한 적이 있습니다. “그들은 아무도 사랑하지 않기에 그저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믿는다.” 차갑고 무미건조한 정결을 많이 봅니다. 근엄하고 차가운 수녀님보다 따듯한 모성이 가득한 수도생활이 되길 바랍니다. 소화 데레사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오. 예수님, 주님의 신부가 되는 것, 그것은 주님과 일치하여 사람들의 어머니가 되는 것입니다.” 수녀님들! 맑고 밝고 명랑하게, 또 때로는 이웃의 아픔에 눈물 흘리는 따뜻하고 사랑 가득한 수도생활이 되길 기도합니다.
   마지막으로 여러분의 순명 서약은 자유에 대한 올바른 척도를 세상에 증거 할 것입니다. 분명히 순명 또한 인간 본성을 거스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십자가에 죽기까지 순명하신 분”께서 당신을 따르는 이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사랑하는 수녀님들! 순명은 수도자의 “카리스마적 죽음”입니다. 우리의 본성을 거스르지만 엄청난 신앙의 신비가 숨어있는 진리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순명은 다른 모든 서원들의 전제 조건일 수 있을 것입니다. 세상은 저마다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 목소리를 높이고 남들 위에 서려는 권력을 우상화합니다. 여러분들의 순명은 이에 대한 세상의 저항으로 메아리 칠 것입니다.
   주님 안에 사랑하는 수녀님.
여러분은 “밭에 뭍인 진주”를 발견하고는 모든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사신 분들입니다. 모쪼록 등경위의 등불처럼 어둠에 찬 이 세상에 빛을 보여주십시오. 복음정신에 투절한 사람, 소명에 불타는 사람은 “무모함”을 보입니다. 그런데 요즘에는 이런 “거룩한 무모함”이 잘 보이질 않습니다. 다 철저한 계산과 대차대조와 손익계산을 통해 하느님의 일을 수행하려 합니다. 근원적인 봉헌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반증일 것입니다. 성령의 능력에 여러분의 모든 계획과 의지와 뜻을 맡기시기를 기도합니다. 어쩌면 여러분들이 우리교구로 오신 것이 하느님의 사랑 가득한 계획일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교구의 한 사제로 여러분들을 환영합니다. 세상에 불을 지르러 오신 분의 불길이 여러분 모두와 수녀회를 온통 태우기를 기도합니다.
   올해로 여러분의 수녀회는 설립 30주년을 맞이했습니다. 세상은 30살을 而立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무엇이든 30년이 지나면 ‘홀로서기’가 가능한 시기라는 뜻으로 생각됩니다. 그러나 주님 안에 사랑하는 수녀님들. 여러분들은 절대로 홀로 서서는 안 됩니다. 아니 홀로설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더욱 주님의 은혜만을 필요로 하는 어린이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주님의 은총이 아니고서는 우리의 모든 수고가 헛되다는 신앙의 진리를 세상에 보여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끝으로 수도생활을 “교회의 꽃”이라 하신 치프리아누스 성인의 말씀으로 강론을 마치고 싶습니다.
“여러분들은 교회에서 피어나는 꽃이요, 자랑이며 은총의 영적 장식입니다. 그러니 그리스도의 양 떼 중에 선택된 여러분은 주님의 거룩함에 가장 부합하는 응답을 드리며, 하느님의 흠 없는 모상을 보여주십시오. 그리하여 먼 훗날 여러분을 우리 모두가 흠모하고 기리게 될 때 우리를 기억해 주십시오.”(De virginitate 5) 아멘.